정말 부조리하군


애인님께서 보여주신 덕분에 연극 <정말 부조리하군>을 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애인님께 감사를. ^^
이게 얼마만에 보는 연극인지 모르겠어요. 2001년이었던가. <미란다>를 본 후에 처음 보는 연극이예요 -ㅁ-;

아무튼 연극은 그냥 보통이었다고 할까요. 소소한 재미는 있었습니다만, 전체적으로는 조금 별로였어요. 객석으로 뛰어드는 닭이라거나 황제의 전라씬 등은 그 자체로는 재미있는 상황이었지만, 연극의 맥락 안에서 볼때는 조금 뜬금없었습니다. 주요 캐릭터의 성격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황제의 경우만 하더라도 제국을 멸망하게 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무능한 척을 하는건지 진짜로 무능한건지가 불분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그 배역의 이름이 '황제를 연기하는 작가'라는 거지요.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은 작가의 꿈이었다는건데. 흠좀무;


이경미님의 평이 좋아서 그중 내용을 다룬 부분을 퍼왔습니다. 출처는 여기

로마제국의 황제 로물루스가 수천 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뒤렌마트와 만났을 때, 그는 로마제국의 황제이면서도 로마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인물로 살아났었다. 침략과 살육, 약탈이라는 만행 위에 세워진 로마는 그 죄를 속죄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마땅히 멸망해야 한다는 것이 뒤렌마트의 로물루스가 황제로서 갖고 있던 정치적 양심이자 신념이다. 이를 위해 그는 철저히 황제의 임무를 방기한다. 아니 로마의 멸망을 위해 치밀하게 노력한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다. 오로지 닭 기르는 것에나 관심을 둔 어릿광대의 흉내를 내면서 수천 명에 달하는 부하의 목숨이 전쟁터에서 게르만족에 의해 스러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죽음도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성으로 진격해 들어온 게르만 족의 장군 오도아커를 만나는 순간, 로물루스의 정치적 계산은 어이없게 어긋나버리고 만다. 오도아커 역시 로물루스와 마찬가지로 게르만족의 역사적 정당성을 회의하고 있는 인물이다. 자신은 물론 로마제국을 역사 속에서 지워달라는 로물루스와 제 2의 로마가 탄생하는 것을 막기위해 게르만족의 항복을 받아들여달라 간청하는 오도아커. 이는 두 인물 모두 전혀 예상치 못한 어이없는 상황이다. 한 동안의 실랑이 끝에 결국 두 정치 지도자가 더 이상 끔찍스런 살육과 침략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오도아커가 이탈리아 황제가 되는 대신 로물루스는 연금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의 정치적 계산은 주변의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러한 선택은 두 사람 모두에게 “죄의식에 시달리며 계속해서 삶을 지탱해가는 것”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뒤렌마트의 로물루스는 다시 수십 년의 세월을 더 뛰어넘어 이윤택과 만나면서, 한 작가의 꿈 속에서 우리의 정치 지도자로 새롭게 변모한다. 닭 키우는 일에나 관심을 가진 이 황제의 정권 하에 한반도는 총체적인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미 국가의 재정은 파탄이 나버렸고, 관료들은 해외로 재산을 빼돌렸다. 게다가 북으로부터 전쟁이 시작되었으나 그의 정치적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국가의 필연성을 의심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우리의 국가란 온갖 고문과 암투, 배신과 탄압, 부패에 의해 유지된 것에 다름아니다. 물론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이러한 정치적 신념은 그의 가족은 물론이고 국가관료 및 정적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직무방기이자 정치적 무능력에 다름아니다. 하지만 그를 살해하기 위해 칼을 들고 둘러 선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 : 내가 내 조국을 반역한 것이 아니다. 내 조국이 스스로 반역한 것이다. 진리를 알면서 결탁을 했고, 민중을 알면서 폭정을 택했다. 같은 민족이 남과 북으로 나뉘면서 스스로를 이중으로 깎아 내렸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했고, 끊임없이 밀고들어오는 외세의 힘에 의존하면서 살았다. 우리가 미소공동위원회의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면서 첫단추는 잘못 끼워졋고, 분단을 넘어서 가려는 우국지사들이 암살자의 총탄에 쓰러지면서 이 제국은 범죄의 그늘에 가려졌다. 〔…〕이 어두운 역사의 늪지대에 세우는 첨단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너희들이 정의의 이름을 외쳤지만, 나야말로 정의의 이빨로 세상을 물어뜯겠다. 내가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다. 내가 공격을 하는 것이다. 자 오너라.

-공연대본-

그러나 원작의 오도아커가 로물루스와 동일한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듯이, 북에서 내려온 ‘키 작은 사내’ 역시 황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권의 정체성에 대해 철저하게 회의하는 인물이다. 황제와 달리 치마를 입은 이 사내는 이미 원작과 달리 바지 대신 치마를 파는 케자르 루프가 상징하는 서구 자본 내지 열강의 압력에 굴복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을 죽여달라는 황제의 간청에 키 작은 사내는 자신 역시 ‘권력의 앞잡이’에 불과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외세의 압력에 굴복한 꼭두각시가 되어 잘못 이끌어온 이 땅의 역사를 그들 두 사람의 선에서 함께 끝낼 것을 제안한다. 케자르 루프같은 해외자본의 침략 앞에서도 후손들이 “이 땅을 떠나지 않고” “둥지를 틀고 튼튼한 알을 까고 버티는 토종닭”들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두 명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것에 합의한 두 사람은 티투스 맘마에게 죽여달라 간청한다. 그러나 총을 다뤄보지 못한 티투스 맘마는 총구를 자신에게 겨눠 하나 남은 총알로 자신을 쏘고, 결국 두 사람은 “죽지 못한다”. ‘세상이 정말 부조리하다’고 뇌까리는 두 사람. 그렇게 무대는 막을 내리고, 두 황제가 자조적으로 부정했던 이 땅의 미래에 대한 질문은 결국 객석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 부조리한 역사 속에서 여전히 무기력한 권력의 꼭두각시 내지 그런 허망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고문과 배반, 음모의 정치적 행위가 이어질 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정치적 결단으로 잘못된 이 땅의 부조리한 역사를 바로 잡게 될 것인지.

두 황제의 입을 빌어 후손들이 ‘필요하면 치마를 입어주면서’ 꿋꿋하게 이 땅에서 살아가는 ‘토종닭’이 되기를 바라는 미래에 대한 이윤택의 전망은 다소 모호하긴 하다. 그러나 이윤택이 한반도의 정치적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근본적이고 총체적이며 역사적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안고 있는 총체적 혼돈 및 위기는 어느 특정 정치인에게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잘못된 역사 및 세계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역학관계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민족적, 지역적 경계를 넘어선 세계화 및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복잡한 세계 정치질서는 한 정치적 개인의 의지와 신념만으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국가니 자유니 정의니 하는 예전의 절대적인 이상적 개념들이 가변적 담론으로 대치되어 버린 지금, 그에 대한 객관적 판단의 기준 조차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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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른미역 | 2007/09/26 01:02 | 연극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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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히카리 at 2007/09/26 01:08
에... 한바탕 꿈이라는 결말은 좀 허무해요; 그나저나 데이트에 연극이군요! 좋았겠어요>_<
Commented by 애인 at 2007/09/26 01:12
연극이 참 부조리했죠.
스토리는 별로였지만 연출은 정말 괜찮았어요. 특히 동선과 조명 사용.
Commented by 유리 at 2007/09/27 09:08
제목이 특이하네요^^
애인님과 연극도 보고 부러워요.
젊을때(?) 결혼하기 전(?)에 많이 문화 생활하고, 많이 보고 듣고... 그러는게 좋더라고요.
난 아줌마 되도 라고 했었는데..역시나ㅠ.ㅠ

참 추석 잘 보내셨나요?
Commented by 파닭 at 2007/09/28 00:54
...블로그에 오자마자 '정말 부조리하군'이라는 제목이 먼저 떠서 흠칫 놀랐습니다[...] 흠좀무[...]
Commented by 마른미역 at 2007/09/28 12:30
히카리// 그렇죠. 사실 그런 결말은 반칙 -_-

애인// 동선과 조명 사용... 같은건 모른다구요;;;

유리// 아앗- 아줌마셨군요! 저는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추석 잘 보냈습니다. 유리님도 추석 잘 보내셨나요? ^^

파닭// 흠좀무;
Commented by 미냐 at 2007/09/29 12:41
부조리극인가요... 전 부조리극은 어렵더라구요 ^^;
그치만 예쁜 아가씨랑 연극 본건 부럽군뇨 +_+
Commented by 마른미역 at 2007/09/30 15:14
미냐// 에에. 예쁜 아가씨랑... 음;;;
Commented by 애인 at 2007/09/30 18:40
흥!
Commented by 마른미역 at 2007/10/04 10:36
애인//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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